이철호 논설고문

영국의 가수 겸 배우인 제인 버킨. 1983년 파리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짐칸에 가방을 넣으려다 내용물이 쏟아졌다. 마침 옆에 앉은 에르메스 사장 장 루이 뒤마에게 “마음에 드는 큰 가죽 가방을 찾기 어렵다”고 투덜거렸다. 뒤마는 바로 구토용 봉투에 쓱쓱 수납공간이 넉넉한 사각형 토트백을 스케치했다. 딸 젖병을 넣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버킨 백의 탄생 이야기다.

에르메스는 원래 파리의 마차용 가죽 제품 명가였다. 1930년부터 승마 액세서리 보관용 백을 본뜬 ‘프티 삭 오트’가 유명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1956년 이 가방으로 임신한 배를 가린 모습이 미국 잡지 ‘라이프’에 실린 뒤 아예 ‘켈리 백’으로 불렸다. 여성용 4대 명품 백으론 에르메스의 버킨 백과 켈리 백, 루이비통의 카퓌신, 구찌의 뱀부 1947 등이 꼽힌다. 이들은 온라인으로 팔지 않는다. 희소성을 위해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몇 년씩 대기하게 만든다.

경매 시장에서 버킨 백과 켈리 백이 엎치락뒤치락 최고가 경쟁을 벌여 왔다. 악어가죽이나 타조 가죽으로 만든 한정판은 4억∼6억 원을 훌쩍 넘었다. 정작 버킨은 인터뷰에서 “내 이름의 백을 든 사람이 많지만, 나는 너무 무겁고 어깨가 아파 잘 들지 않는다. 요즘은 남자처럼 주머니에 이것저것 다 넣고 다닌다”고 했다. 그나마 사용하던 백은 “경매에 비싸게 팔아 자선단체에 기부할 수 있어 유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2015년 악어가죽 버킨 백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1억 원짜리 백을 만들기 위해 2∼3살 새끼 악어(평균 수명은 80년)의 뇌와 척추를 절단하고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잔인한 영상이 파문을 부른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생물은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는 버킨 백을 향한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에르메스는 마케팅과 홍보팀을 따로 두지 않는다. 그런데도 루이비통·구찌·샤넬 등과 달리 나 홀로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 10일 검은색 오리지널 버킨 백이 소더비 경매에서 858만2500유로(약 137억 원)에 팔렸다. 기존 최고가였던 켈리백보다 20배 가까이 높은 사상 최고가다. 버킨은 2023년 7월 16일 타계했다. 미술품과 명품은 특정인의 죽음을 계기로 영원한 생명력과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속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출처: 문화일보(202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