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이탈리아 남부에 살레르노라는 도시가 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의 발목 정도에 위치하는데 인근 로마나 나폴리보다 작고, 볼거리도 많지 않아 관광객들의 선호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흐름이 변할 때마다 등장하는 도시로 이름 높다. 1944년,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는 이곳에서 소련식 혁명 모델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식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의 ‘살레르노의 대전환’을 선언한 뒤 공산당을 제도권 정당으로 탈바꿈시켰다. 톨리아티의 결단 덕분에 이탈리아는 냉전시대 동유럽처럼 소련 위성국이 되지 않았고, 전후 자유 진영 선진국 모임인 주요7개국(G7) 멤버가 됐다.

인구 13만 명의 작은 항구 도시가 요즘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자유 진영 국가들이 퇴출시킨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72)가 오는 27일 캄파니아주의 살레르노 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는 발표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게르기예프는 캄파니아주 카세르타 왕궁의 여름 교향악 축제 지휘자로 출연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러시아 음악계를 좌지우지해온 ‘친(親)푸틴’ 지휘자가 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 유럽연합(EU)의 지원금이 투입되는 축제에 참가한다고 하자 비판이 들끓고 있다. 살레르노의 유럽 의회 소속 인사들은 “납세자들의 돈이 범죄정권 지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게르기예프 초청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캄파니아 주 정부 측은 “대화와 인간 연대의 가치 확인을 위한 음악회”라며 강행 의지를 거듭 밝혀 논란이 커지는 기류다.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공연계의 양대 산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총감독을 겸하는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로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21년 공연을 가진 바 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전쟁 후 게르기예프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등 대표적 친푸틴 음악인들을 공연계에서 추방했다. 이후 이들은 푸틴 편에 선 중국과 중동 국가들을 중심으로 음악회를 개최해왔다. 81년 전 소련식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자유 진영에 희망을 줬던 도시가 친푸틴 지휘자에게 면죄부를 준 첫 도시로 기록될 것 같아 유감이다.

출처: 문화일보(202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