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원 기자

200억원대 부동산 기부하고 사후 시신도 기증 서약한

신영오·조숙자 부부의 사연 "운 좋게 물려받은 것이니 당연"

지난 25일 오후 서울 염리동에 있는 조숙자(82)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신축 아파트 단지가 무성한 동네에 있는 낡은 단독 주택이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조 교수와 부부로 50년 넘게 살던 신영오(85) 연세대 생명시스템대학 명예교수는 지난달 별세했다. 그는 죽기 전 이 집과 부지를 연세대에 신탁 형태로 기부했고, 시신도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다.

고(故) 신영오 연세대 생명시스템대학 명예교수. /신애선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제공

본지를 포함해 신 교수의 선행을 보도한 대부분의 매체는 기사 제목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란 표현을 썼다. 조선닷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검색하면 지난 1년간 지면에 나온 일곱 건의 기사가 뜨는데, 그중 당사자의 행위로 기사에 등장한 건 신 교수가 유일하다.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척척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부부가 살았던 이 집과 부지의 가치는 200억원에 달한다. 신 교수 사후 기증이 바로 이뤄지면서 조 교수는 연세대 교직원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결혼 후 세 자녀를 키우며 50년 넘게 살아온 150평짜리 집에서 나와 15평 기숙사에 들어갈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게다가 기숙사 월세 150만원까지 내야 하는데 억울하지는 않을까. 세상을 떠난 남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받고 있지만 세상에 남은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남편의 기부 때문에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된 조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이면을 들추는 칼럼을 쓰는 게 애초 방문 목적이었다.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칼럼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신 교수와 조 교수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30대 초·중반에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남편을 보자마자 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금방 결혼을 결정했다. ‘성격이 대쪽 같은 남편과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고 물어보는 지인도 많았는데, 나도 남편과 성격이 같아서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기부 역시 누가 먼저 제안한 게 아니었다. 조 교수는 “남편과 내 삶의 목표는 한결같았다. 우리에게 돈에 욕심을 내지 않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기부도 함께 결정했다”고 했다.

자녀와는 일절 상의하지 않았다. 결혼 50주년을 맞은 2023년 부부는 연세대를 찾아 기부 관련 서류를 작성했고,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가족 식사에서 두 딸과 아들에게 알렸다. 다들 “알았다” “그러실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성격도, 생각도 닮은 남녀가 만나, 부모를 닮은 자녀까지 키워낸 셈이다. “이 동네가 빈촌(貧村)이던 시절, 시아버지가 땅을 싸게 사서 지은 집이고, 운 좋게 남편과 제가 그걸 물려받은 거죠. 애당초 저희 것이 아니라서 애들한테 줄 생각이 없었고, 기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둘 다 평생 월급쟁이였던 덕분에 애들은 배우는 데 모자람이 없었고,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으니 우리한테 물질적 상속을 바라지 않는 게 당연하고요.”

신 교수의 젊은 시절, 그가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음반기획사가 찬송가 음반을 내자고 찾아왔다. 남편의 유언에 따라, 그때 만든 앨범을 장례식장에서 틀었다. 조 교수가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에 맞춰 신 교수가 부른 노래가 울려 퍼졌다. 말 그대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본래의 취재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기 위해선 돈이나 지위 말고 필요한 게 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우자나 가족이 뜻을 함께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 이거야말로 요새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아닐까.

출처: 조선일보(2025.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