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일러스트=유현호

‘자서전 읽기’는 치유 효과가 있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간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삶의 기본 값인 실패와 좌절을 피할 순 없다. 그럼에도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게 ‘큰 인물’의 공통점이다.

학업 성적은 꼴찌였건만 좋아하는 언어와 역사엔 비범했던 처칠은 결국 히틀러의 마수에서 문명 세계를 구한다. 여섯 권으로 된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 영웅 처칠이 총선 패배로 장엄하게 퇴장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시인 김지하는 세 권으로 된 자서전 ‘흰 그늘의 길’을 남겼다. 한국 현대사의 폭풍 한가운데서 난파한 ‘문제적 개인’이 세계와의 불화와 화해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군사독재에 맞서 정상과 광기의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시인의 내면이 절절하다.

삶의 서사가 풍부한 공인은 이처럼 자서전을 남겨야만 한다. 한 시대의 도전에 응전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무늬와 결이 모여 형성된다. 거대 사건들만 역사를 만드는 건 아니다. 각자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이어지는 게 역사의 ‘실체’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정치적 이유로 자서전 문화가 활발하지 않다. 중요한 자리에 있던 공인이 재직 중 일화를 밝히는 게 필화(筆禍)를 부르곤 했다. 읽을 만한 자서전이 많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명망가들일수록 개인적 상처를 진솔하게 드러내거나 주위 사람을 평가하는 게 부담스럽다. 체면을 중시하고 연고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 자칫 인간관계 파탄까지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글로 기록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평생 문맹이던 어르신들이 한글을 익혀 서툰 필체로 펴낸 삶의 서사를 보라.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글로 내게 된 기쁨이 빛난다. 미국의 동네 도서관엔 보통 사람들의 자서전이 가득하다. 역사학의 흐름도 영웅 서사를 넘어 미시사(微視史)와 생활사를 중시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초등생 시절 선생님이 일기 쓰기를 권장했던 건 교육적 의미가 컸다. 자기 성찰과 자아 표현의 통로인 자서전 쓰기를 예습한 셈이다. 평생 무명의 철학 교수였던 아미엘(H.-F. Amiel, 1821~1881)은 40년에 걸친 1만7000쪽 일기를 남겼는데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사후에라도 타인이 공감해 주기를 바란 간절한 ‘희망’으로 읽힌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는 만인의 공개 일기장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다. 소셜 미디어로 표현한 삶과 사유의 조각들은 거의 ‘영구히’ 남는다. 보통 사람조차 동시대 인류와 실시간으로 소통 가능해졌다. 시·공간의 한계와 언어 장벽까지 넘어선 발언권의 무한 확장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자서전을 기록하는 안성맞춤 무대로 선용할 수 있다.

난 독서 후기와 영화평을 비롯한 개인적 상념들은 페이스북에 올리곤 한다. 그때그때 기록하지 않았으면 무의식의 심연으로 사라졌을 토막글들이다. 서재 구석 깊숙한 곳엔 중학부터 대학까지 쓴 누렇게 바랜 수십 권 일기장이 숨겨져 있다. 유치찬란하지만 치열했던 청춘의 자화상. 쓰지 않았더라면 망각의 저편으로 소멸하고 말았을 ‘나’의 얼굴들.

글쓰기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지름길이다. 글은 혼란하고 무의미한 삶에 ‘뜻’과 질서를 부여하는 나침반이다. 당신이 지금 한 자 한 자 힘겹게 눌러 쓴 글은 하나뿐인 당신의 자취를 세상에 각인시킨다. 말은 사라지고 언젠가 당신이 부재하게 될지라도 글은 영원히 남는다. 우리, 자서전들 쓰십시다!

출처: 조선일보(202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