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논설위원

일러스트=박상훈
벤 스틸러 주연의 ‘박물관은 살아있다’ 시리즈에서 유물은 밤이 되면 생명을 얻는다. 세계에서 약 1.8조원을 벌어들인 이 대형 흥행작에서 공룡 뼈는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고, 거대 석상 모아이는 껌 달라고 떼를 쓰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홀을 누빈다. 현실의 박물관은 반대다. 두꺼운 유리 진열장 너머의 유물은 정물이다. 관객에게 침묵과 관조를 요구한다. 종종 ‘유물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유다.
▶코로나19로 세계가 멈췄을 때, 네덜란드에서 신선한 시도가 있었다. 집에 갇힌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을까. 시민들은 미술관 소장품을 패러디해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베르메르의 걸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대표적이다. 사람 대신 옥수수 한 자루를 얼굴 삼고, 머리 부분에 비닐봉지 둘러 터번을 만든 뒤 진짜 진주 대신 단추를 달아 이 명화를 재현했다. 마늘·휴지·수건 같은 일상 소품으로 걸작들을 위트 있게 재해석한 작품이 쏟아졌다. 시민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 게티 미술관도 그때 “집에 있는 물건 세 가지로 명화를 재현하라”는 제안을 던졌다. 어떤 가족은 고흐의 걸작 ‘붓꽃’을 선택해 찰흙, 당근 조각, 나무 구슬로 화폭을 완성했다. 두루마리 휴지로 셔츠의 주름 깃을 만들고, 반려견을 품에 안은 채 고전 초상화를 흉내 낸 사진들도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리창 너머 갇혀 있던 미술품이 일상으로 걸어나왔다.
▶지난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분장 대회’ 최종 결선이 열렸다. 석조약사불이 걸어 다니고 신라 금귀걸이가 쌍으로 찰랑거리며 고려청자가 곡선을 살린 채 무대를 걸었다. 대상은 통통 튀는 잉어의 모습을 유쾌하게 재현한 ‘백자 잉어 모양 연적’이 차지했다. 잉어로 분장한 참가자가 연속 점프하며 뛰어다닐 때 네티즌은 ‘금수저 아닌 근(筋)수저’라는 별명을 붙였다. 해외 사례가 명화 속 인물이나 구도를 흉내 내는 데 그쳤다면, 한국에선 온몸으로 유물을 재현했다. 대상 수상자의 어머니는 딸의 변신에 “내 배에서 어떻게 저런 게…”라며 감탄 혹은 한탄을 쏟아냈다고 한다.
▶유물의 ‘유’는 남길 유(遺)다. 세월이 지나 남아 있는 물건이라는 수동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와 현대적 해석이 더해지면 수천 년 전 유물은 지금,이곳으로 걸어나온다. 진열장 안에 갇혀 있던 도자기의 곡선과 금속의 빛깔이 살아 있는 예술이 된다. 관객이 유물과 놀고 웃고 이야기할 때, 박물관은 더 이상 죽은 공간이 아니다. 국중박은 살아있다.
출처: 조선일보(2026.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