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열 논설위원

일러스트 이철원
일본 오사카 상인들에겐 “아들은 못 골라도 사위는 고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능력 있는 사위나 직원을 양자로 들여 가업을 잇는 ‘무코요시(데릴사위 양자)’ 전통이다. 지금도 일본 입양의 대부분은 성인이다. 스즈키자동차를 40년 넘게 이끈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도 창업가의 사위가 되며 양자로 들어갔다.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사위를 양자로 들여 파나소닉 2대 사장을 맡겼다. 일본에 수백 년 된 장수 기업이 유독 많은 비결로 꼽힌다.
▶최근 중견기업 세라젬 창업주가 평사원으로 입사해 20년 넘게 회사를 다니며 성과를 낸 전문 경영인을 양자로 입양하고, 지분 10%를 증여하며 후계자로 낙점했다. 핏줄과 장자 승계의 통념을 깬 파격이다. 1971년 유한양행 유일한 창업자는 경영권을 전문 경영인에게 넘겼고 전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다. 메리츠금융 조정호 회장도 일찌감치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전문 경영인 중심의 책임 경영 체제를 안착시켰다.
▶바다 건너 상속 풍경도 다채롭다. 1926년 캐나다 변호사 찰스 밀러는 “10년간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여성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유언으로 희대의 ‘출산 더비’를 촉발했다. 결국 9명씩 낳은 여성 4명이 유산을 나눴다. 에르메스 가문 5대손은 100억달러대 재산을 자신을 돌본 정원사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가문의 반발로 결국 무산됐다. 반려견에게 1200만달러를 남긴 미국 호텔 재벌도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능력주의’ 유형이 많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팀 쿡, 사티아 나델라처럼 실력을 증명한 전문 경영인에게 조종대를 맡겼다.
▶때로는 ‘가문 경영’의 강력한 결속력이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힘이 된다. 미국 월마트의 월턴 가문, 독일 BMW의 콴트 가문, 5남매가 명품 제국을 나눠 이끄는 프랑스 LVMH의 아르노 일가가 대표적이다. 오너 일가의 주인 의식과 명예는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는 10~20년 단위의 과감한 투자와 신속한 결단을 가능케 해 기업을 지탱한다.
▶상속의 문법이 달라지는 데는 현실적 이유가 있다. 저출생으로 대를 이을 자녀가 귀해졌고, 자식이 있어도 가업을 잇겠다는 2세는 줄었다. 기술과 시장이 급변하면서 검증된 실력 없이는 경영하기도 어려워졌다. 핏줄이든 실력이든 결국 승계의 핵심은 ‘누가 적임자냐’는 것이다. 그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기업 생태계가 유연해졌다는 신호다.
출처: 조선일보((2026.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