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고리토 브라질 출신 방송인·사업가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우리는 종종 정보기술(IT) 강국, 혹은 K컬처의 힘을 이야기한다.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 전 세계를 사로잡은 드라마와 음악. 이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국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던 또 다른 중요한 성취가 있다. 바로 생명공학, 특히 백신 분야에서의 ‘조용한 혁명’이다. 어쩌면 생명공학이나 백신의 성과는 K팝 스타의 화려한 무대나 드라마틱한 서사처럼 즉각적으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우리 삶 가장 깊숙한 곳, 바로 생명과 건강에 맞닿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백신은 소아마비, 천연두 같은 질병을 통제한 인류 건강의 파수꾼이다. 이 백신 개발과 보급 뒤에는 헌신적인 과학자들과 이름 없는 현장의 영웅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이 중요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이뤄냈다. 과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자체 개발한 백신을 세계에 공급하는 나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는 반도체 신화나 K컬처 열풍 못지않은 놀라운 성과다. 부끄럽게도, 나름의 한국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조차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나를 일깨운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올해 서울에서 열린 ‘박만훈상’ 시상식이었다. 박만훈상은 한국 백신 개발의 선구자로 불리는 고 박만훈 박사의 이름을 따 백신 연구 및 공중보건 발전에 기여한 국내외 인물과 단체를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이 상의 존재 자체가 한국이 더 이상 기술 수혜국이 아닌, 글로벌 보건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선도국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올해는 브라질에서 백신 접종이 어려운 지역의 접종률을 높이는 데 이바지한 루이자 트라자누 브라질여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인도 출신으로 경구용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아난다 반디오파디아이 박사 등 전 세계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돼 서울을 찾았다. 세계 공중보건의 주요 인사들이 유엔 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이나 세계보건기구(WHO) 본부를 둔 스위스 제네바가 아닌 서울에 모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불과 반세기 전,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국은 외국의 원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했고 소아마비, 결핵,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했다. WHO, 유니세프 같은 국제기구와 여러 우방국이 보내준 구호품과 백신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거나 외국 의료진의 도움을 받던 기억은 조부모 세대에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놀랍게도 이제 한국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세계 앞에 서 있다. 2024년 국산 의약품 수출액은 약 75억 달러(약 10조4100억 원)를 돌파했으며, 특히 백신과 바이오의약품은 핵심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WHO ‘글로벌 바이오 인력 양성 허브’로 지정돼 전 세계의 인재를 키워내고 있으며, 1997년 유치한 국제백신연구소(IVI)는 서울에서 세계 빈곤국을 위한 백신 연구개발을 이끌고 있다. 팬데믹 시기에는 국제 백신 공유 프로젝트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에 2억 달러 이상을 공여하며 명실상부 ‘받는 나라’에서 ‘기여하는 나라’로 발돋움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성장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과 책임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수상을 위해 한국을 찾은 트라자누 회장은 “단결된 시민사회의 힘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의 말은 비단 브라질 사회에만 국한된 통찰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낸 저력에도 위기 앞에서 하나로 뭉쳤던 시민들의 힘이 있었다. 이제 세계 보건의 중요한 축으로 당당히 선 한국. 우리가 이룬 이 ‘조용한 혁명’의 가치와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한국 사회는 얼마나 깊이 공감하고 있을까?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나 기업의 혁신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한국의 새로운 역할이 지속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국민들의 꾸준한 관심과 지지가 필수적이다. 해외에선 이미 한국의 저력을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 국민들은 아직 자국이 백신 분야에서 이룬 성취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이 만들어 온 이 길에 국민들이 충분한 관심과 자부심을 가질 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모을 때 비로소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 조용한 혁명의 의미를 되새기고, 목소리를 낼 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세계 속에서 더욱 단단하고 자랑스럽게 빛날 것이다.

출처: 동아일보(2025-05-07)